흔적

삼일 뒤 조카는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집에는 여전히 아이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 책상 위의 기저귀, 바닥에 내팽개쳐진 에어컨 리모컨, 파스텔 색감의 이케아 유아용 식기 등등. 무엇보다 멍하니 집에 있을 때면 문득 내 뒤로 성큼성큼 걸어와 턱, 하고 내 목덜미나 머리카락을 움켜쥐던 아이의 손길이, 눈이 마주쳤을 때 부채꼴 모양으로 휘어지던 아이의 눈매가 그리웠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잠시였고 대부분의 시간은 떨어진 에너지를 보충하는 데에 쓰였다. 긴 잠을 잤고, 아주 오랜만에 요가를 갔고, 여유롭게 가지 라자냐를 만들어 먹었다.

호우가 가신 도시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찜통 더위가 찾아왔다. 숨 막히는 더위를 뚫고 나는 카페로 나가 밀린 작업을 했다. 아직은 정확히 어떻게 되는 것인지, 어떤 형식이나 구조로 길을 트는 것인지 모르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듬었다.

오늘 아침엔 H시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 이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말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어쩌면 그냥 나만 읽고 말 수도 있다고. 친구는 일순간 가만히 화면 속의 나를 응시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네가 무슨 글을 써도 난 읽을 테니까, 독자는 늘 한 명 더 있는 거야. 그런 다정한 말들로 우리는 긴 통화를 끊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7월이 훌쩍 지나간 뒤였다. 아니, 실은 아직도 7월이 지나가지 않은 것이 원망스럽다. "그냥 견디고 있는 거야" 라고 내가 친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문득 굉장한 피로와 함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고, 괜스레 다케오의 커다란 녹나무 생각이 나 인터넷으로 항공편을 알아보았다. 슬프게도 항공사는 이미 해당 노선의 운행을 중단한 상태였다. 아. 그렇구나. 모든 게 또 바뀌어버렸구나. 힘이 풀려 나는 새로운 여행지를 탐색했다. 눈이 많이 내리는 A시였다. 그곳엔 내가 좋아하는 요시모토 나라의 거대한 강아지 조형물이 있는데,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그곳을 홀로 여행하는 꿈을 꾸곤 했다. 더불어 도시와 조금 떨어진 곳에 오이라세 강이 있고, 나무 풍경이 멋진 리조트와 때때로 통신이 끊기며 곰이 나오는 트래킹 코스가 있지 않은가.



잠시 눈을 감고 그 도시를 여행하는 나를 상상했다. 20대. 검은 배낭 하나를 메고 어디든 가던 그 시절처럼 또다시 그렇게 무모하고 낭만적으로 삶을 여행할 수 있을까. 


상상이 끝나는 곳엔 빈 천장이 있었다. 머리맡에서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열어둔 창문으로는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그래, 아직은 ...... 아직은 모든 게 너무 뜨거운 여름이구나. 아직은 곡식이 여물지 않았고, 나에겐 감당해야 하는 날들이 있구나. 그 서글픈 깨달음을 잠잠히 받아들이려 나는 눈을 몇 번 느리게 깜빡였다.


https://youtu.be/5oyzJJzl6QQ?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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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olation